외할머니가 사과를 꼭 소금물에 담갔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스테인리스 대야에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소금을 한 숟가락 떠서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사과 네 쪽이 그 안에 풍덩 들어갔다. 나는 식탁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걸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과가 물속에서 살짝 떠 있는 게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 과일을 물에 넣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깎았으면 바로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외할머니 댁은 오래된 빌라 1층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 보이는 구조였고, 부엌은 두 사람이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형광등이 하나 있었는데 켤 때마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싱크대 옆 선반에는 항상 과일이 있었다. 비닐봉지에 담긴 채로 놓여 있는 것들. 시장 끝물에 사오신 거라 상처가 있거나 한쪽이 조금 물러진 것도 많았다. 외할머니는 그런 건 신경 안 쓰셨다. 물러진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나머지를 깎아서 대야에 담갔다.
그 부엌에는 냄새가 있었다. 반찬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과일 냄새가 섞인 묘한 공기. 겨울에는 거기에 귤 껍질 냄새가 더해졌다. 외할머니는 귤을 드시고 나면 껍질을 버리지 않고 싱크대 한쪽에 모아두셨다. 냄새가 좋으니까 그런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버리기 아까우셨던 것 같기도 하다.
사과를 소금물에서 건져 올리면 표면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외할머니가 그걸 접시에 올려놓으면 나는 바로 집어서 먹었다. 입에 넣으면 아주 살짝 짭짤한 맛이 남아 있었다. 달면서 짠. 이상한 맛인데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냥 사과보다 그게 더 익숙했다. 지금도 사과를 먹으면 가끔 그 짭짤한 맛이 혀끝에서 어른거린다. 실제로는 안 짠데.
외할머니는 본인은 잘 안 드셨다. 사과를 깎아서 접시에 담아 내 앞에 놓고, 본인은 설거지를 하거나 뭔가를 또 하고 계셨다. 내가 다 먹었느냐고 물으면 그제야 접시에 남은 한 쪽을 집어 드셨는데, 항상 제일 작은 쪽이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외할머니는 원래 적게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고마운 줄도 몰랐다. 매주 가는 집이었고, 갈 때마다 과일이 깎여 나오는 게 그냥 당연한 풍경이었으니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아마 없었던 것 같다. 확실하진 않은데, 없었을 것 같다는 쪽이 더 맞을 거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내가 스물두 살 때였다. 장례식장에서 이모가 외할머니 부엌 이야기를 하다가 울었다. 나는 그때 울지 않았다. 왜 안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슬프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냥 실감이 안 났던 것 같다. 매주 가던 그 빌라 1층에 더 이상 안 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모르는 느낌이었다.
자취를 시작한 건 스물여섯이었다. 원룸이었다. 부엌이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한, 싱크대 하나랑 인덕션 하나가 벽에 붙어있는 공간. 냉장고는 싱크대 옆에 겨우 들어갔고, 조리대는 도마를 올리면 다른 걸 놓을 데가 없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혼자 사과를 깎았다.
과일칼이 없어서 식칼로 깎았다. 껍질이 두껍게 벗겨졌다. 외할머니는 껍질을 얇게 쭉 돌려 깎으셨는데, 내가 하니까 조각조각 끊어지면서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절반도 안 남은 것 같았다. 좀 참담했다. 접시도 마땅한 게 없어서 도마 위에 그냥 올려놓고 두 쪽 먹었다. 나머지 두 쪽은 랩을 씌워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이틀 뒤에 꺼냈더니 단면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때 처음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소금물에 담갔던 거. 아, 이래서 그랬던 거구나. 갈색으로 변하니까. 깎아놓으면 변하니까. 그걸 막으려고 매번 소금물을 만들고 담갔던 거구나.
서른 가까이 되어서 깨달았다. 누가 알려준 게 아니라 갈색으로 변한 사과 두 쪽을 들고 서서 혼자 알아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 바로 뒤에, 뭔가 다른 감정이 왔다. 이름을 잘 모르겠는 감정. 소금물에 사과를 담그는 그 작은 행동 안에 들어있던 것이 갑자기 보였다고 해야 할까.
외할머니는 사과를 깎아서 그냥 줄 수도 있었다. 근데 매번 소금물을 만들었다. 소금 떠서 넣고, 젓가락으로 젓고, 사과를 담가두고, 내가 먹을 때까지 하얗게 유지되도록. 그게 손주한테 예쁜 사과를 주려는 마음이었다는 걸, 나는 갈변한 사과를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소금이 산화효소 작용을 억제해서 갈변을 늦추는 거라고 하더라. 과학적으로는 그렇다.
근데 나한테 그건 과학이 아니다. 그건 외할머니가 사과 네 쪽을 하얗게 유지해주려고 했던 마음이다.
요즘도 가끔 사과를 깎는다. 과일칼은 생겼는데 여전히 잘 못 깎는다. 껍질 두꺼운 건 포기했고, 모양은 신경 안 쓴다. 소금물은 만들 때도 있고 안 만들 때도 있다. 혼자 먹으니까 갈변해도 상관없으니까. 근데 가끔, 소금을 한 숟가락 떠서 물에 풀 때, 그 지직거리던 형광등 아래 좁은 부엌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순간이 온다. 아주 짧게. 한 2초 정도.
그 2초 동안은 외할머니 댁 부엌에 있다.
사과를 소금물에서 건지면 아주 살짝 짭짤하다. 그 맛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달면서 짠, 그 묘한 맛. 나는 그 맛을 잊은 적이 없다.
접시에 사과를 올리면 나도 모르게 한 쪽을 남겨둔다. 별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게 된다.
그 한 쪽은 보통 나중에 내가 먹는다. 가끔은 그냥 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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