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귤은 왜 이불 속에서 먹어야 제맛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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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 어두워지는 시간이 빨라지기 시작하면, 마트 과일 코너에 귤이 쌓인다. 5킬로 박스, 3킬로 박스, 낱개 망. 주황색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으면 아, 이제 겨울이구나 싶다. 달력을 보고 겨울을 아는 게 아니라 귤을 보고 안다. 나는 그렇다. 올해도 귤을 샀다. 3킬로짜리 박스. 자취하면서 5킬로를 산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반을 못 먹고 물러져서 버렸다. 그 뒤로는 3킬로만 산다. 그것도 후반부에 가면 좀 아슬아슬하다. 귤이라는 과일이 그렇다. 살 때는 이걸 언제 다 먹나 싶은데, 먹기 시작하면 또 순식간이다. 근데 어느 순간 손이 안 가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빠르게 물러진다. 그 타이밍을 매번 놓친다. 귤은 이불 속에서 먹어야 한다. 이건 개인 취향이 아니라 거의 진리에 가까운 것 같다. 소파에서 먹어도 되고 식탁에서 먹어도 되는데, 이불 속에서 먹는 귤은 맛이 다르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데 정말 다르다. 따뜻한 이불 안에 있으면서 차가운 귤을 입에 넣으면, 그 온도 차이 때문인지 단맛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닐 수도 있다.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근데 기분 탓이어도 맛있으면 된 거 아닌가. 문제는 껍질이다. 이불 속에서 귤을 까면 껍질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가 애매하다. 처음에는 휴지 위에 올려놓았는데, 까다 보면 귤즙이 손에 묻고 그 손으로 이불을 만지게 되고, 결국 이불에 귤 냄새가 밴다. 그게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좋다. 근데 사흘 정도 지나면 귤 냄새가 좀 시큼한 냄새로 변하는데, 그건 좀 별로다. 요즘은 작은 비닐봉지를 하나 가져가서 그 안에 껍질을 넣는다. 이 방법을 터득하기까지 자취 3년이 걸렸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혼자 살면 이런 사소한 생활 기술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전부 직접 겪으면서 배워야 한다. 귤 껍질 처리법 같은 걸 누가 가르쳐주겠나. 근데 이런 게 쌓이면 꽤 피곤하다. 외할머니 댁에서 겨울을 보낼 때, 귤은 항상 거실 바닥에 있었다. 박스째 놓여 있었다. 외할머니는 귤 박스를 사오시면 뚜껑을...

마트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들고 계산대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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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트에 간 건 계란을 사려고였다. 계란만 사면 되는 거였다. 근데 마트라는 곳이 그렇다. 입구에서 과일 코너를 지나가게 되어 있다. 동선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계란은 안쪽에 있고, 과일은 입구 바로 옆에 있다. 안 볼 수가 없다.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이 선명한 놈들이 쌓여 있었다. 한 송이에 1990원. 싸다. 과일 중에 바나나가 제일 싼 것 같다. 크기 대비, 무게 대비, 열량 대비. 가성비로 따지면 바나나를 이길 과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집었다. 반사적으로. 집어들고 나서 생각이 시작됐다. 한 송이가 다섯 개였다. 다섯 개. 혼자 사는 사람한테 바나나 다섯 개는 많다. 하루에 한 개씩 먹으면 닷새. 근데 나는 하루에 한 개씩 꼬박꼬박 먹는 사람이 아니다. 첫날에 두 개 먹고, 둘째 날에 한 개 먹고, 셋째 날부터 잊어버린다. 넷째 날에 보면 껍질에 갈색 반점이 생겨 있고, 다섯째 날이면 검은 점이 번져서 물렁물렁해진다. 이 시나리오를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바나나를 다시 내려놨다. 그리고 두 발짝 걸었다. 멈췄다. 다시 돌아와서 집었다. 1990원인데. 이걸 안 사는 게 맞나. 과일을 좀 먹어야 하는데. 건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바나나 한 개에 칼로리가 대략 100정도라고 알고 있다. 아침에 우유랑 같이 먹으면 괜찮은 식사가 된다. 그 생각까지 하면 사는 게 맞다. 근데 또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이 생각을 하면서 샀다. 결과가 어땠나. 세 개를 먹고 두 개를 버렸다. 그 전에도 그랬다. 네 개를 먹고 한 개를 버렸다. 바나나를 사면 반드시 한두 개는 버리게 되는 게 나의 패턴이다. 그걸 알면서 또 사는 건 좀 어리석은 거 아닌가. 다시 내려놨다. 계란만 사자. 원래 목적대로. 계란 코너로 걸어갔다. 계란 한 판을 집었다. 계산대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바나나 진열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노란색이 자꾸 눈에 밟혔다. 1990원. 커피 한 잔보다 싸다. 두 개만 먹어도 본전이다. 세 개 먹으면 이득이다. 다시 돌아가서 ...

딸기를 씻어놓고 깜빡했더니 아침에 전부 물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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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하고 들어오니까 여덟 시 반이었다. 현관에 신발을 벗으면서 냉장고에 딸기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어제 마트에서 산 거. 한 팩에 5900원이었다. 봄이라 딸기가 제일 예쁠 때였다. 빨갛고 윤기 나고, 꼭지 쪽 초록색까지 선명한 놈들로 골랐다. 사면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과일 좀 먹자, 하는 마음이었다. 냉장고에서 딸기 팩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상태가 좋았다. 하루 지났는데도 아직 탱탱했다. 이걸 빨리 씻어서 먹어야지. 그래서 씻었다. 체에 담아서 물을 틀고,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굴려가며 헹궜다. 딸기는 세게 씻으면 상처가 나니까 살살 해야 한다. 꼭지는 아직 안 땄다. 꼭지를 떼고 씻으면 물이 들어가서 맛이 연해진다는 걸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서, 꼭지째 씻었다. 씻은 딸기를 유리 그릇에 담았다. 빨간 딸기가 투명한 그릇 안에 들어있으니까 꽤 예뻤다. 자취방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뿌듯했다. 이대로 소파에 앉아서 하나씩 집어먹으면 완벽한 저녁이다. 근데 그 전에 샤워를 먼저 하자고 생각했다. 땀을 좀 흘려서 끈적거렸거든요. 샤워하고 나와서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았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샤워를 했다. 나왔다. 머리를 말리면서 폰을 봤다. 유튜브를 틀었다. 영상 하나가 끝나고 다른 게 자동재생됐다. 그걸 또 봤다. 그러다가 누웠다. 눈이 감겼다. 일어나니까 아침이었다. 여섯 시 반. 알람 소리에 눈을 떴는데 머리가 안 말라 있었다. 어젯밤에 머리 말리다가 잠든 거였다. 이불 위에 수건이 깔려 있었다. 폰은 배터리가 3퍼센트였다. 아, 충전도 안 했구나. 출근 준비를 하다가 부엌을 지나가는데, 조리대 위에 유리 그릇이 보였다. 딸기. 어젯밤에 씻어놓은 딸기. 밤새 밖에 나와 있었다. 냉장고에도 안 넣고. 그릇 안을 들여다봤다. 딸기가 물러져 있었다. 전부. 표면이 푹 들어가 있고, 밑에 깔린 것들은 위에 있는 것들 무게에 눌려서 으깨져 있었다. 그릇 바닥에 붉은 즙이 고여 있었다. 씻었을 때 남은 물기가 딸기를 더 빨리 상하게 한 거...

여름 첫 자두는 항상 너무 셔서 눈을 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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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트 과일 코너에 자두가 나오면 여름이 시작된 거다. 귤을 보면 겨울이 온 걸 알듯이, 자두를 보면 여름이 온 걸 안다. 아직 에어컨을 안 틀었어도, 반팔을 안 꺼냈어도, 자두가 진열대에 올라오면 그게 신호다. 올해도 그랬다. 5월 말쯤이었나. 과일 코너를 지나가는데 짙은 빨간색 알맹이들이 투명 팩에 담겨 있었다. 표면에 하얀 가루 같은 게 살짝 묻어 있는, 그 자두. 한 팩을 집었다. 4900원이었다. 여덟 알 정도 들어있었다. 첫 자두는 비싸다. 한여름이 되면 가격이 내려가는데, 시즌 초반에는 좀 센 편이다. 그걸 알면서도 샀다. 매년 그렇다. 첫 자두를 보면 그냥 사게 된다. 왜 그런지 나도 잘 모르겠다. 여름이 왔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운 건지. 집에 와서 씻었다. 자두는 씻기가 편하다. 물에 넣고 몇 번 굴리면 된다. 껍질을 깎을 필요도 없고 잘라야 할 것도 없다. 씻어서 바로 베어 물면 된다. 자취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과일이 고맙다. 준비 과정이 거의 없으니까. 첫 번째 알을 베어 물었다. 이빨이 껍질을 뚫고 들어가는 그 느낌. 탱탱한 표면이 갈라지면서 속살이 드러나는 순간.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 다음에 신맛이 왔다. 입 안 전체로 퍼지는 시큼함. 눈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뺨 안쪽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침이 확 돌면서 턱 아래가 찡했다. 셨다. 올해 첫 자두도 셨다. 자두가 시즌 초반에 신 건 이유가 있다고 한다. 아직 완전히 익기 전에 수확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고. 유통 과정에서 후숙이 좀 되긴 하지만, 나무에서 완전히 익은 것보다는 당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제철 한가운데인 7월쯤 자두가 가장 달다는 뜻이다. 알고 있다. 매년 겪는 건데 알고 있다. 근데 매년 5월 말에 또 산다. 시다는 걸 알면서. 두 번째 알을 먹었다. 역시 셨다. 근데 첫 번째보다는 좀 나았다. 입이 적응한 건지, 아니면 이 알이 좀 더 익은 건지. 자두는 같은 팩 안에서도 개체 차이가 크다. 어떤 알...

외할머니는 복숭아를 드실 때 항상 껍질째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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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숭아가 익으면 표면에 솜털 같은 게 보인다. 빛을 받으면 얇은 털이 하나하나 서 있는 게 보이는데, 어릴 때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손에 닿으면 까끌까끌하고, 그 느낌이 입술에 닿을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았다. 복숭아는 좋아했다. 달고 물이 많아서. 근데 그 껍질만은 도저히 못 참겠었다. 외할머니는 복숭아를 껍질째 드셨다. 물에 한번 헹구고 그냥 베어 무셨다. 즙이 손등으로 흘러내리면 반대쪽 손등으로 닦으시면서 드셨다. 맛있다는 말도 안 하셨다. 그냥 조용히 드셨다. 가끔 씨 주변에 붙은 살을 이로 긁어내듯 드시는데, 그 소리가 좀 거슬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기억이다. 나는 매번 깎아달라고 했다. 외할머니가 복숭아를 꺼내시면 나는 반사적으로 "깎아주세요" 했다. 외할머니는 그러마 하고 칼을 꺼내셨다. 복숭아 껍질을 깎는 건 사과보다 어렵다. 물러서 칼이 자꾸 파고들고, 껍질이 얇아서 살이 같이 벗겨진다. 외할머니 손에서도 껍질이 깔끔하게 벗겨지진 않았다. 중간중간 살이 뜯겨나가면서 울퉁불퉁한 표면이 됐다. 근데 나는 그래도 그게 좋았다. 까끌까끌한 껍질이 없으면 그걸로 됐다. 외할머니는 본인 것은 안 깎으셨다. 내 것만 깎아주시고 본인은 껍질째 드셨다. 한번은 내가 왜 안 깎아 드시냐고 물었다. 외할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대충 이런 뜻이었다. 깎으면 버리는 게 많아서. 복숭아는 껍질 바로 밑이 제일 달다고. 그걸 깎아내면 아깝다고.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다. 껍질이 까끌까끌한데 그게 뭐가 달다는 건지. 어린 나한테는 그냥 싫은 게 싫은 거였다. 외할머니의 이유 같은 건 관심이 없었다. 그냥 깎아주시면 됐다. 여름마다 복숭아 상자가 외할머니 댁에 들어왔다. 누가 보내준 건지 직접 사신 건지는 잘 모르겠다. 둘 다였던 것 같기도 하다. 복숭아 상자를 열면 하얀 스티로폼 틀에 복숭아가 하나씩 박혀 있었다. 그 틀을 빼면 복숭아 냄새가 확 올라왔다. 달큰하면서 약간 꽃 같은 냄새. 그 냄새는 ...

편의점 컵과일과 직접 깎아먹기, 결국 어느 쪽이 더 귀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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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의점 냉장 코너에서 컵과일을 처음 집어든 건 작년 여름이었다. 퇴근길이었고 더웠고 뭔가 시원한 게 먹고 싶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려다가 옆에 있는 투명 컵이 눈에 들어왔다. 멜론, 파인애플, 포도가 작게 잘려서 담겨 있었다. 3900원. 비싸다고 생각했다. 근데 샀다. 더우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집에 와서 뚜껑을 열고 포크로 하나 찍어 먹었다. 차가웠다. 달았다. 근데 뭔가 좀 밋밋했다. 멜론은 단맛이 있긴 한데 향이 거의 없었고, 파인애플은 약간 질겼고, 포도는 포도 맛이 맞긴 한데 뭐랄까, 무표정한 맛이었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기억에 남지 않는 맛. 먹고 나서 뭘 먹었는지 금방 잊어버릴 것 같은 맛. 컵 바닥에 과일 즙이 좀 고여 있었는데 그건 안 마셨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건 좀 꺼려지더라. 그날 밤에 생각했다. 3900원이면 마트에서 사과 두 개를 사고도 남는다. 포도 한 송이도 살 수 있다. 직접 사서 직접 깎으면 양도 더 많고 맛도 더 낫지 않나. 그래서 다음 날 마트에서 사과를 두 개 샀다. 의욕이 있었다. 직접 깎아먹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집에 와서 과일칼을 꺼냈다. 사과를 씻고, 도마에 올리고, 깎기 시작했다. 껍질이 두꺼워졌다. 늘 그렇다. 얇게 깎으려고 하면 칼이 미끄러지고, 그러면 무서워서 두껍게 깎게 된다. 한 알 깎는 데 한 5분 걸렸다. 깎고 나니까 도마 위에 껍질이 수북하고, 사과는 원래 크기의 7할 정도로 줄어 있었다. 먹을 수 있는 부분만 놓고 보면 컵과일이랑 양이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좀 슬펐다. 접시에 담아서 먹었다. 확실히 달랐다. 방금 깎은 사과는 살아있는 맛이라고 해야 하나. 수분이 입 안에서 터지는 느낌이 있었다. 아삭하고 시원하고, 향도 확실했다. 편의점 컵과일에서 느꼈던 그 밋밋함이 없었다. 사과 한 알의 승리.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먹고 나서 도마를 씻고, 칼을 씻고, 껍질을 버리고, 싱크대에 튄 사과즙을 닦아야 했다. 5분 깎고 3분 먹고 7분 치운 거다. 총 ...

냉장고 서랍에서 포도를 발견했는데 이미 늦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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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장고 야채칸 서랍을 연 건 다른 걸 찾으려고였다. 양파가 하나 있었던 것 같아서 꺼내려고 서랍을 잡아당겼는데, 양파 옆에 비닐봉지가 하나 있었다. 묵직하진 않았다. 가볍지도 않았다. 반투명 비닐 너머로 보라색 같은 게 비쳤다. 뭐지. 열어봤다. 포도였다. 언제 산 건지 기억이 안 났다. 알맹이가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팽팽하던 표면이 쪼그라들면서 주름이 잡혀 있었고, 몇 알은 줄기에서 떨어져서 봉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색도 변해 있었다. 샀을 때는 짙은 보라색이었을 텐데, 지금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냄새를 맡아봤다. 시큼한 냄새까지는 아니었는데, 포도 특유의 달큰한 향이 좀 탁하게 변해 있었다. 아직 썩진 않았다. 근데 먹고 싶지도 않았다. 봉지를 들고 서서 한참 생각했다. 이걸 언제 샀지.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정확한 날짜가 안 떠올랐다. 일주일 전인가. 아니면 열흘 전인가. 마트에서 산 건 기억이 났다. 과일 코너 지나가다가 포도가 세일이길래 하나 집었다. 그때 분명 오늘은 씻어서 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거기까지가 내가 포도에게 한 전부였다. 그 다음부터는 잊어버렸다. 완전히. 냉장고를 열 때마다 눈에 안 들어왔다. 야채칸 서랍은 원래 잘 안 열거든요. 양파나 마늘 같은 거 넣어두는 칸인데, 그것도 자주 꺼내는 게 아니니까 며칠씩 안 열 때가 많다. 포도는 거기서 조용히 쭈글쭈글해지고 있었던 거다. 아무도 안 찾아주는 줄 모르고. 아니, 과일이 그런 걸 알겠나. 그냥 내가 미안한 거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꽤 자주 있다. 방울토마토를 사서 한 줌 먹고 나머지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곰팡이 핀 걸 발견한 적이 있다. 블루베리를 샀는데 용기 뚜껑을 한 번도 안 열고 유통기한이 지난 적도 있다. 체리는 한번은 씻어놓고 물기를 안 닦았더니 하루 만에 물러졌다. 과일에게 나는 꽤 무책임한 사람이다.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 살면 과일을 사는 나와 먹는 내가 같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