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를 씻어놓고 깜빡했더니 아침에 전부 물러져 있었다
퇴근하고 들어오니까 여덟 시 반이었다. 현관에 신발을 벗으면서 냉장고에 딸기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어제 마트에서 산 거. 한 팩에 5900원이었다. 봄이라 딸기가 제일 예쁠 때였다. 빨갛고 윤기 나고, 꼭지 쪽 초록색까지 선명한 놈들로 골랐다. 사면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과일 좀 먹자, 하는 마음이었다.
냉장고에서 딸기 팩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상태가 좋았다. 하루 지났는데도 아직 탱탱했다. 이걸 빨리 씻어서 먹어야지. 그래서 씻었다. 체에 담아서 물을 틀고,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굴려가며 헹궜다. 딸기는 세게 씻으면 상처가 나니까 살살 해야 한다. 꼭지는 아직 안 땄다. 꼭지를 떼고 씻으면 물이 들어가서 맛이 연해진다는 걸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서, 꼭지째 씻었다.
씻은 딸기를 유리 그릇에 담았다. 빨간 딸기가 투명한 그릇 안에 들어있으니까 꽤 예뻤다. 자취방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뿌듯했다. 이대로 소파에 앉아서 하나씩 집어먹으면 완벽한 저녁이다.
근데 그 전에 샤워를 먼저 하자고 생각했다. 땀을 좀 흘려서 끈적거렸거든요. 샤워하고 나와서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았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샤워를 했다. 나왔다. 머리를 말리면서 폰을 봤다. 유튜브를 틀었다. 영상 하나가 끝나고 다른 게 자동재생됐다. 그걸 또 봤다. 그러다가 누웠다. 눈이 감겼다.
일어나니까 아침이었다. 여섯 시 반. 알람 소리에 눈을 떴는데 머리가 안 말라 있었다. 어젯밤에 머리 말리다가 잠든 거였다. 이불 위에 수건이 깔려 있었다. 폰은 배터리가 3퍼센트였다. 아, 충전도 안 했구나.
출근 준비를 하다가 부엌을 지나가는데, 조리대 위에 유리 그릇이 보였다. 딸기. 어젯밤에 씻어놓은 딸기. 밤새 밖에 나와 있었다. 냉장고에도 안 넣고.
그릇 안을 들여다봤다. 딸기가 물러져 있었다. 전부. 표면이 푹 들어가 있고, 밑에 깔린 것들은 위에 있는 것들 무게에 눌려서 으깨져 있었다. 그릇 바닥에 붉은 즙이 고여 있었다. 씻었을 때 남은 물기가 딸기를 더 빨리 상하게 한 거다. 물기를 안 닦고 그릇에 담은 게 문제였다. 거기에 실온에서 밤을 보냈으니까.
한 알을 집어봤다. 손가락이 표면을 누르니까 거의 저항 없이 들어갔다. 말랑한 정도가 아니라 물컹했다. 냄새를 맡아봤다. 시큼한 냄새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젯밤의 그 싱싱한 딸기향은 아니었다. 좀 탁한 단내 같은 게 났다. 먹을 수 있나 없나 경계선에 있는 상태. 한 알을 입에 넣어봤다. 물렁했다. 단맛은 있었는데 식감이 없었다. 씹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뭉개지는 느낌. 딸기의 매력은 아삭함과 물컹함 사이의 그 딱 좋은 식감인데, 이건 그냥 물컹함만 남아 있었다.
5900원. 그 돈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자취생한테 5900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편의점 도시락 하나 값이다. 그걸 밤새 조리대 위에 놓아두고 잤다. 씻기까지 해놓고. 아까운 건 돈만이 아니었다. 어젯밤에 씻으면서 느꼈던 그 뿌듯함도 아까웠다. 유리 그릇에 담아놓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먹기만 했으면 됐는데 샤워를 먼저 하겠다고 한 게 패착이었다.
결국 반 정도는 버렸다. 너무 물러진 것들. 나머지 반은 좀 나은 편이어서 억지로 먹었다. 맛이 없진 않았는데 기분이 좀 그랬다. 싱싱할 때 먹었으면 맛있었을 딸기를 이런 상태로 먹고 있다는 게.
딸기는 물에 약한 과일이다. 나중에 제대로 찾아보니까, 딸기를 씻은 뒤에는 키친타월로 물기를 확실히 닦아주고 바로 먹는 게 좋다고 하더라. 안 먹을 거면 씻지 말고 냉장 보관하는 게 맞다고. 씻은 상태로 보관하면 물기 때문에 곰팡이가 빨리 피고 과육이 물러진다고. 그걸 알았으면 씻어놓고 안 먹을 바에 그냥 냉장고에 팩째 다시 넣었을 거다.
외할머니는 딸기를 먹기 직전에 씻으셨다. 미리 씻어놓는 법이 없었다. 지금 먹을 만큼만 꺼내서 씻어서 접시에 담으셨다. 그게 과일을 다루는 제일 바른 방법이었는데, 나는 한 팩을 한꺼번에 씻어놓는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근데 그 효율이라는 게,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일 이후로 딸기를 살 때 규칙을 하나 만들었다. 씻으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다 먹는다. 씻어놓고 나중에 먹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안 씻는다. 팩째 냉장고에 넣고, 먹고 싶을 때 꺼내서 먹을 만큼만 씻는다. 외할머니 방식이다. 결국 돌아왔다.
이 규칙을 세운 지 좀 됐는데 솔직히 완벽하게 지키고 있진 않다. 가끔 또 한꺼번에 씻어놓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유리 그릇에 담긴 물러진 딸기가 떠오른다. 붉은 즙이 바닥에 고여 있던 그 모습.
다음부터는 진짜 먹을 만큼만 씻자. 이 다짐을 올해 봄에만 세 번은 한 것 같다.
네 번째도 곧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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