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서랍에서 포도를 발견했는데 이미 늦었더라

 냉장고 야채칸 서랍을 연 건 다른 걸 찾으려고였다. 양파가 하나 있었던 것 같아서 꺼내려고 서랍을 잡아당겼는데, 양파 옆에 비닐봉지가 하나 있었다. 묵직하진 않았다. 가볍지도 않았다. 반투명 비닐 너머로 보라색 같은 게 비쳤다. 뭐지. 열어봤다.

포도였다. 언제 산 건지 기억이 안 났다.

냉장고 야채칸 서랍 안 비닐봉지에 담긴 쭈글쭈글해진 보라색 포도

알맹이가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팽팽하던 표면이 쪼그라들면서 주름이 잡혀 있었고, 몇 알은 줄기에서 떨어져서 봉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색도 변해 있었다. 샀을 때는 짙은 보라색이었을 텐데, 지금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냄새를 맡아봤다. 시큼한 냄새까지는 아니었는데, 포도 특유의 달큰한 향이 좀 탁하게 변해 있었다. 아직 썩진 않았다. 근데 먹고 싶지도 않았다.

봉지를 들고 서서 한참 생각했다. 이걸 언제 샀지.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정확한 날짜가 안 떠올랐다. 일주일 전인가. 아니면 열흘 전인가. 마트에서 산 건 기억이 났다. 과일 코너 지나가다가 포도가 세일이길래 하나 집었다. 그때 분명 오늘은 씻어서 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거기까지가 내가 포도에게 한 전부였다.

그 다음부터는 잊어버렸다. 완전히. 냉장고를 열 때마다 눈에 안 들어왔다. 야채칸 서랍은 원래 잘 안 열거든요. 양파나 마늘 같은 거 넣어두는 칸인데, 그것도 자주 꺼내는 게 아니니까 며칠씩 안 열 때가 많다. 포도는 거기서 조용히 쭈글쭈글해지고 있었던 거다. 아무도 안 찾아주는 줄 모르고. 아니, 과일이 그런 걸 알겠나. 그냥 내가 미안한 거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꽤 자주 있다. 방울토마토를 사서 한 줌 먹고 나머지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곰팡이 핀 걸 발견한 적이 있다. 블루베리를 샀는데 용기 뚜껑을 한 번도 안 열고 유통기한이 지난 적도 있다. 체리는 한번은 씻어놓고 물기를 안 닦았더니 하루 만에 물러졌다. 과일에게 나는 꽤 무책임한 사람이다.

왜 이러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 살면 과일을 사는 나와 먹는 내가 같은 사람인데, 그 두 명의 의지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마트에서 과일을 집어드는 순간의 나는 의욕이 넘친다. 오늘 씻어서 먹어야지, 건강하게 살아야지. 근데 집에 도착하는 순간 그 의욕이 사라진다. 냉장고에 넣는 것까지가 한계다. 씻고, 그릇에 담고, 먹는 그 세 단계를 넘기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흰 접시 위에 놓인 싱싱한 포도 한 송이와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

외할머니 댁에서는 과일이 남아서 버려지는 일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사오시면 그날 안에 깎아서 나왔고, 내가 먹었다. 남으면 외할머니가 드셨다. 순환이 빠르니까 상할 틈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건 외할머니가 관리를 잘 하신 거였다. 시장에서 사와서 씻고, 깎고, 접시에 담고, 식탁에 놓는 그 과정을 누군가가 매번 해줬던 거다. 그게 없어지니까 과일이 냉장고에서 죽어간다.

포도가 특히 그렇다. 포도는 사면 바로 씻어서 먹어야 한다. 줄기에서 알을 따고, 물에 담가서 여러 번 헹궈야 한다. 그 과정이 다른 과일보다 번거롭다. 사과는 하나 집어서 씻어 베어 물면 되는데, 포도는 그렇게 안 된다. 준비가 필요한 과일이다. 그 준비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포도는 냉장고에서 잊힌다.

나중에 찾아보니까 포도는 냉장 보관 시 씻지 않은 상태로 보관하는 게 오래 간다고 하더라. 표면에 하얀 가루 같은 게 묻어있는데 그게 천연 코팅 역할을 해서, 씻으면 오히려 빨리 상한다고. 그걸 알았으면 좀 나았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 같다. 문제는 보관법이 아니라 내 게으름이니까.

쭈글쭈글해진 포도를 봉지째 들고 쓰레기통으로 갔다. 버리면서 좀 찝찝했다. 돈이 아까운 것도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이 포도가 마트 진열대에서 싱싱하게 놓여있던 순간이 떠올라서 그랬다. 누군가는 이 포도를 수확했을 거고, 누군가는 포장했을 거고, 누군가는 트럭에 실어 날랐을 거다. 그 과정을 다 거쳐서 내 냉장고까지 온 건데 나는 봉지도 안 열어봤다. 좀 그렇더라.

버리고 나서 냉장고 야채칸을 한번 다 꺼내봤다. 양파 하나, 마늘 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봉지가 하나 더 있었다. 열어봤더니 깻잎이었다. 누렇게 변해 있었다. 이것도 언제 산 건지 모르겠다.

한숨이 나왔다. 나는 냉장고 야채칸을 무덤처럼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넣어놓고 잊어버리고,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매번 반성하는데 매번 또 그런다.

다음에 포도를 사면 냉장고에 넣지 말고 바로 씻어서 그릇에 담아놓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눈에 보이고, 눈에 보여야 먹으니까. 근데 이 다짐도 전에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한두 번이 아니라 서너 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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